생활의 지혜

강도 잡은 용감한 시민과 해고되는 은행원

안영도 2009. 8. 25. 15:53

2009. 8. 25


신체보전 효지시야(身體保全 孝之始也)


2009년 8월초에 국내 각 일간지는 “강도 잡은 은행원이 직장에서 해고되었다”는 뉴스를 제법 큼지막하게 전했다.1)  대부분의 신문 독자들은 의아했을 것이다.  “아니, 강도를 잡았으면 포상을 해야지 벌, 그것도 가장 무거운 벌을 주다니…”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다행히도” 그 소식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온 것이었다.  한국이라면 어땠을까?  한국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는데, 10여년  에 어떤 새마을금고의 여직원이 흉기든 강도를 맨손으로 제압하였고, 우리 사회는 그녀에게 “용감한 시민상”을 수여하였다.  같은 일을 두고 사회의 반응이 어쩌면 그렇게 다를까? 

        은행 강도는 총검을 소지하였으므로 그에 저항하면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의 생명에 위해를 줄 수 있으므로 결코 대항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은행은 그런 행위를 금지하고 있고, 그 내규를 무시한 직원은 당연히 해고 감인 것이다.  한국에서 그런 행위를 표창하는 이유도 짐작할 수는 있다.  용감한 행원 덕분에 금전적 손실을 막았고, 그 공적을 인정해 주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잘못된 사회적 메시지

        어느 접근방법이 옳을까?  잘 생각해 보면 미국의 방법이 옳다.  무릇, 어떤 행위에 대한 평가와 보상(補償)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가 과거에 대한 응보(應報), 즉 업적에 상응하는 보상(報償)이다.  좋은 결과가 있었기 때문에 성과물의 일부를 나누어 준다는 말이다.  둘째는 미래를 향한 유인(誘引, incentive)이다.  같은 일을 하면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있으니 적극 노력하라는 의미이다.  미국에서는 상벌이 주는 유인 효과를 중요시하고, 한국에서는 응보를 먼저 내세운다.

        상벌의 우선순위를 응보와 유인 중의 어디에 두어야 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그런데 사람의 안위(安危)가 걸린 일에 대해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유인”을 중요시해야 한다.  다른 어떤 것도 목숨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새마을금고 사건의 경우 그 여직원을 표창함은 타인도 본받으라는 의미인데, 미안하지만 그것은 “절대로, 절대로 따라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도 보통은 생명을 중시하라는 메시지를 준다.  예컨대, TV에서 다소 위험한 쇼 장면을 보여주면 “따라 하지 마세요”라는 문구를 내보낸다.  그처럼 부상을 입을 정도의 것을 두고는 경고를 하면서, 목숨을 잃을 위험한 일을 권장함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용감한 시민”이라면서 표창하는 일 자체가 “매우 위험한 관행”인 것이다.  문제가 심각한 것은 그런 잘못이 한국 사회에서 매우 자주 관찰된다는 점이다.

        몇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일본의 지하철 사고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고 자신은 사망한 이모씨는 의인(義人)이 됐다.  다가오는 전동차를 막겠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고, 자칫 모두가 죽을 수도 있다.  히말라야 14좌 등반을 추진하다가 사망한 고모씨에 대해서는 정부가 훈장을 수여하였다.  보도에 따르면 그녀는 경쟁의식 때문에 위험한 연속 등반을 서두른 측면이 있다고 한다.  역시 무모한 일이었다.2) 

        2009년 8월 중순에는 서해안 고속도로 상에서 남의 사고를 도우려던 황모, 금모라는 두 명의 여성이 스스로의 목숨을 잃고 말았다.3)  여름이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다 익사하는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모두가 무모한 일일 뿐이다.  그렇지만 한국 정부는 그와 같은 경우에 “의사상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서 국가유공자에 준한 보상과 대접을 실시한다.  죽은 사람이 딱하고 불쌍한 것은 사실이므로 정부가 동정해 주는 것은 좋다.  그렇지만 게다 대고 “의(義) 운운” 하는 것은 잘못이다.  학교에서 교육받은 바에 따르면 “의로운 일”이란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기 자식이 무모한 짓을 하다 죽거나, “의사상자”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는 권장한다.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가?

        약간은 다른 사안이지만 신체의 보호에 대해서 잘못된 메시지를 주는 일은 또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경찰이 도주하는 강도나, 과격시위 중인 폭도에 무기를 사용하면 “과잉 방어”라고 곧잘 나무란다.  그것도 큰 잘못이다.  법치 확립의 필요성을 제쳐 두더라도, 강도나 폭도를 순순히 다루면 자칫 경찰 관리의 신체가 위험에 노출된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어떤가?  어떤 누구도 감히 경찰에 대놓고 저항하지는 않는다.  미국의 악한이 더 착한 게 아니고, 저항하다간 경찰의 총에 죽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미국 경찰 관리의 신체는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바로 상벌이 주는 유인 효과 덕분이다.4)


불감훼상 효지시야

        한국 사회는 생명의 보전에 대해서 왜 그렇게 잘 못된 메시지를 보낼까?  저자가 보기에 요즈음의 어른들이 철없는 짓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예전의 가르침은 지금의 메시지와는 정반대이었으니까.

        우리의 전통 문화에서 효(孝)는 더 없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효는 인의(仁義)라는 대인관계, 치국(治國)이라는 사회경영의 출발점이다.  그것이 시원찮으면 아무것도 제대로 될 수 없는 것이다.  아울러, 전통적 가르침은 “신체발부(身體髮膚) 수지부모(受之父母), 불감훼상(不敢毁傷) 효지시야(孝之始也)”이다.  자식 된 도리로서 가장 중요한 일이 본인의 신체를 보전하는 일이며, 그것이 바로 효의 출발점이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사회는 청소년들로 하여금 위험한 일에 함부로 뛰어들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예전에도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일컬어져 왔고, 또 그런 사람도 많았다.  “대의를 위한 희생”은 권장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앞의 보기는 모두 대의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다른 사람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유교의 가르침을 한 토막 더 소개하면서 답변에 대신한다.5)


재아(宰我)가 물었다: “인자(仁者)는, 만약 그에게 ‘우물에 사람이 빠져 있습니다’ 고 말한다면, 그는 빠진 자를 구하러 우물 속으로 뛰어 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그렇게 하겠느냐?  군자라면, 그를 우물가로 가게 할 수는 있으나, 그가 우물 속으로 뛰어들게 할 수는 없고, 사리(事理)에 맞는 말로 그를 속일 수는 있으나, 도리에 어긋난 말로 그를 속여 해칠 수는 없다.” (『論語』)

… 

“가서 보니 정말 우물 속에 사람이 빠져 있다면 어찌 합니까?”

          소씨(蘇氏)는 말했다.  “물에 빠진 자를 구하는 것은 인자(仁者)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목숨을 희생시키고도 남에게 유익함이 없는 짓이라면 인자라면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고.

          만약 임금이나 부모가 위험에 처해 있다면 신하나 자식 된 자가 구하러 달려가는 것이 옳은 도리이겠으나, 그럴 때에도 구할 장비를 찾아서 해야지 맨몸으로 무턱대고 따르지는 않는다. (朱子. 『論語或問』)


        


<주>

 

1) e.g.) “강도 잡은 美 은행원, 포상은 고사하고 해고.” 중앙일보, 2009. 8. 5 

 

2) 똑 부러지게 구분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무모함(recklessness)은 어리석고, 모험(risk taking)은 때때로 권장된다.  그 둘의 차이는 사전 준비의 정도와 비용․편익의 비교에 따른다.  에베레스트를 처음 정복한 힐러리 경(Sir Hillary)의 경우는 당시로서는 최선의 준비를 했을 것이고, 등정의 의의가 고모씨와는 사뭇 달랐다.  

 

3) e.g.) “갓길 2차사고 ‘어이없는 죽음’ 너무 많다.” 조선일보, 2009. 8. 14 

 

4) 미국경찰에 저항하다 목숨을 잃는 재미교포의 사례가 더러 보도되는데 국내언론은 경찰을 나무라곤 한다. 나무라는 것이야 말릴 수 없지만, 미국의 경찰이나 강도가 한국과 같으리라 생각하면 본인의 생명이 위태로워진다.  그 나라에서는 경찰이나 강도가 “꼼작 마 ” (Freeze!) 라고 소리치면 그야말로 꼼짝하지 않아야만 한다.  

 

5) 박기봉 역주. 『교양으로 읽는 논어』. 비봉출판사, 2000, p.1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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