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은 언제나 무조건 옳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는 정치학(politics), 시장경제는 경제학(economics) 용어이다. 용처가 다르지만 그 둘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다름 아닌 자유, 자유의지 혹은 선택의 자유(freedom to choose)이다. 대표자를 혹은 상품을 자발적으로 고르는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여론(public opinion)은 언제나 옳고, 그 선택은 신성한 것(sacred cow)으로 간주된다. 마찬가지로 시장경제에서 시장은 언제나 옳고, 가격(price)은 신성한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이 노망에 걸렸다”고 하거나 “대통령의 자격이 없다”고 하는 것은 정치인으로서의 자격을 의심하게 하는 발언이다. 같은 취지로 “아파트 가격이 너무 높기 때문에 상한제를 도입한다”고 하거나 “이동통신 통화료가 너무 비싸서 대중을 괴롭힌다”고 하는 것은 계획경제에나 맞을 사고방식이다.
자발적 선택은 모두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일 따름이다. 아무도 아파트를 사라고, 이동통신 서비스를 이용하라고 강요하거나 협박하지 않는다.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 민주주의인가, 전제주의인가? 시장경제인가, 계획경제인가? 아마도 대답을 망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생각은 그렇지만 실상은 어떠한가? 2003년 5월에 당시 주한 중국대사가 지인의 말을 빌려 “한국이 중국보다 더 사회주의적(socialist)이다”라고 뉴스위크 기자에게 말한 사실로써 필자의 의견을 가름한다.
기술 및 사고의 혁신
시장에서의 경제적 선택, 다중의 정치적 선택이 실제로 옳은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우선 단기적 관점에서 보면 최선이 아닌 경우가 매우 많다. 처칠이 말한 것처럼 민주주의는 완벽한 것이 아니고, 인류가 겪어본 것 중에서는 최선일 뿐이다. (Democracy is the worst form of government except for all those others that have ever been tried.) 마가렛 대처의 언급처럼 시장경제보다 나은 대안을 생각할 수는 없다. (There is no alternative.)
장기적으로는 어떠한가? 변화가 없으면 정체라고 비판을 받는다. 실제로 현실의 선택은 끊임없이 진화한다. 진화는 곧 발전을 말한다. 위대한 경제학자 조지프 슘피터는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 곧 기업혁신이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이라 적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마찬가지로 여론도 혁신의 과정을 밟는다. 기업혁신은 기업가의 몫인데, 여론 혁신은 누구의 몫일까? 정의에 따라서 여론지도층(opinion leaders)이 아니겠는가?
한국은 어떠한가? 기업 얘기는 접어두고 여론 혁신을 생각해 보자. 누가 여론 주도층이고 그들은 과연 여론을 이끌어 가는가? 여론을 선도해야할 지도층이 여론 뒤에 숨어서 당장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지는 않는가?
TV는 제쳐두고,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어떤가? 스스로의 주장대로 둘의 영향력이 막강하고, 주류 언론임에는 틀림이 없다. 시장경제의 논리에 따라서 그들 신문은 명백히 주류이다. 그런데 그 두 신문은 어떤가? 여론을 이끌어 가는가?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 “현재의 여론”이 주목하는 사건이라면 온통 관련 기사로 도배를 하고 있다. 그 신문의 인터넷 판은 클리커(clicker)들에게 아부하기 위해서 “너는 내 운명” 같은 근친상간적이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드라마에 관해서, 박지성의 신변잡사에 대해서 보도하면서 일부러 “꼭지수를 대여섯 개로 늘린다.” 여론을 이끌기보다는 뒤좇기 바쁜 것이다.
정치인이야 현재의 여론이 현재의 밥그릇이니 그렇다 쳐도, 자칭 “정론지”(正論紙)까지 그러면 누가 혁신을 맡을 것인가? 그들 신문이 제 몫을 한다면 The New York Times, The Wall Street Journal, 혹은 Financial Times 같은 신문은 왜 본받지 못하나?
획일주의 사고
여론의 혁신이 없으면, 제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고 결과는 획일주의사고이다. 획일주의 사고는 쏠림 현상을 불러와서 도처에 정체가 일어나고 발전은 어렵게 된다.
필자는 한국인의 획일적 사고에 대해서 크게 우려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필자는 대학에서 국제통상이란 과목을 강의하는데 아래가 단골로 가지는 학생들과의 대화이다:
<문> 여러분은 농업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답> 네. (아마도 95% 쯤)
<문> 보호무역은 누구를 보호하고 어느 계층이 희생됩니까?
<답> 생산자가 혜택을 입고, 소비자가 손실을 봅니다.
<문> 여러분은 농산품 생산자와 소비자 중에서 누구와 가깝습니까?
<답> 소비자와 가깝습니다. (아마도 97% 쯤)
<문> 그러면 여러분들은 모두 이타주의자(利他主義者)이군요.
<답> …
쏠림 현상도 따지고 보면, 획일주의 사고와 다중의 뒤에 숨으려는 안일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말하면 출산율 저하 현상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에 한국은 1.2를 기록하고 있어서 세계 최하이지만 1970년대만 해도 4.5였다. 역설적으로 필자는 그것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쏠림을 활용하면 그 해법을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토불이
획일적 사고의 근인(近因)이 지도층의 역할 부재라고 한다면, 원인(遠因)은 유교적 사상, 순혈주의 여건 등이라 할 것이다. 전통만을 내세우고, 과도하게 조상을 숭배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과거를 유지하자 함이므로 혁신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희망하는 것이 된다. 혁신은 다양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하는 만치 순혈(純血)은 자랑이 아니고 기피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해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니까, 여기서는 이 정도로 줄인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신토불이(身土不二)는 농협의 선전문구(ads copy)로는 이상적이지만 일반인이 즐겨 쓸 말은 아니다. 농협의 말도 선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요즘 청소년의 체격(身)이 건장하게 된 것이 우유 때문일 터인데 언제부터 그게 우리 땅(土)에서 났던가?
2002년 6월, 2008년 4월, 그리고 2009년 5월
소표제의 세 시기에 공통적인 것은 그 바탕에 신세대인 클리커(clicker)들의 힘이 작용한 점이다. 그들은, 그리고 그들만이 인터넷이라는 토론의 장을 효과적으로 이용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한계이다. 인터넷에 서툰 기성세대를 그들이 대변하지는 않고, 그럴 수도 없다. 정의에 따라서 그들은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 그들의 의견은 설익었을 뿐이다. 세 경우의 또다른 공통점은 인터넷이 불을 지른 그들 사이의 획일주의이다. 색깔은 각각 달랐지만 통일되어 있었고 참여한 사람은 모두가 열기에 가득차 있었다. 전형적 획일주의였다. 그런데 우리 지도층은 어떠했는가? 신세대의 여론에 편승했는가, 다른 방향으로 인도할 노력을 했는가?
조선일보는, 그리고 중앙일보는 어떻게 했는가? 2002년의 광화문 등지의 1백만 응원인파를 응집력 운운하면서 침이 마르게 칭찬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자랑스러워했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의 생각은 우리와 사뭇 달랐다. (특히 서양 사람들은 나치의 “획일주의”에 몸서리친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당자에게는 생사가 걸린 일이지만, 죽는다고 과거가 묻히는 것은 아니다. 죽은 사람에게 동정하는 것이야 나무랄 것 없지만, 생전의 온갖 나무람이 한 순간 이후에 칭송으로 바뀌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그 이후의 여론은 누가 올바르게 이끌어 가는가? 생사는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만, 사회가 주는 평가에는 일관성과 계속성이 있어야 여론이 바로 형성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사회의 평가” 라는 인센티브에 반응하고, 그 "모든 사람"이 바로 여론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김동길 씨는 2009년 5월말의 노란색 물결을 보고 “또 하나의 정부가 있다”고 했지만 그것이 진정 그의 생각이었다면 두 가지 잘못이 있다. 지금 정부는 엄연히 이명박 정부이며 그것을 부정하면 민주주의적 사고는 아니다. 아프가니스탄을 빼고는 어디가나 정부는 하나뿐이며, 그래야 한다. 그는 또 “왜 대통령이 되셔가지고 우리(보수세력)를 모두 이렇게 만드냐”고 불만을 털어놨다는데, 보수주의의 세계가 달라진 것도 크게 없고, 하루아침에 달라질 일도 아니다. 그가 말하는 사건은 시쳇말로 착시현상일 뿐이고, 착시를 바로잡는 것이 바로 여론지도층의 일이다. 그런데 지도층이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다.
민주주의에서 여론은 신성불가침이지만 여론지도층이 여론을 “선도”(先導 및 善導)해야만 사회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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