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지혜

고조부모가 몇 분인지 아시나요?

안영도 2011. 8. 17. 17:45

2011. 8. 17

과거 대비 미래

 

 

세계를 통틀어 한국인만큼 전통을 존중하는 민족도 드물 것이다. 설날과 추석이면 인구의 삼분지 일이 이동하는 바람에 나라 땅덩이가 온통 몸살을 앓는다. 산 부모를 팽개치는 일이 흔하지만 죽은 조상을 챙기는 일에는 끔찍하다고 말할 정도로 열성이다. 봄의 한식, 여름의 벌초, 가을의 시제 시즌이 되면 어김없이 전국의 도로에서 정체가 빚어진다. 세어보면 조상 한 분에게 일 년에 다섯 번 제사를 지내고, 다섯 차례나 묘소를 방문(省墓)한다.

        전통을 존중함은 과거를 중시한다는 의미이다. 한국인의 과거 지향성은 족성(族姓) 및 고향에 대한 집착에서도 드러난다. 대중가요, 가곡, 동요를 불문하고 고향을 그리는 노래가 유난히 많다. “성을 간다,” “후레자식” 등의 격한 표현은 모두 족성을 신성시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해외에 이민간 사람도 한국전통을 계승해야만 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별로 관심도 없는 이민 2~3세들에게 “모국”을 강조한다.

 

 

1. 일용할 양식이 생기는 것은 미래

        인간생활에서 과거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흘러간 물이다. 그리고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는 것은 미래이지 과거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오로지 미래만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그렇다고 과거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과거는 체험의 현장이고 거기서 우리는 지혜를 얻는다. 그렇게 얻은 지혜를 바탕으로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게 되고, 보다 나은 인생살이 방법을 찾아낸다, 바로, 그런 점에 과거를 향한 바람직한 자세가 담겨져 있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제외한다면 과거란 무의미한 것이다. The past is irrelevant except for lessons therefrom. 그런 맥락에서 조상을 지극정성으로 숭배하는 것보다는 자식을 제대로 교육시키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민 간 사람에게는 출신국이 아니라 체재국이 모국(motherland)이 되어야 마땅하다.

 

 

2. 전통의 의의

        과거에서 파생된 전통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도 물론 아니다. 전통을 지킴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고, 가까운 친지가 두루두루 모임으로써 삶의 즐거움을 새삼 느끼기도 한다. 전통을 공유함으로써,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거래비용(transaction cost)을 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경제학 용어 중에 “길따라 가기”(path dependence)라는 것이 있다. 선악을 떠나서 과거가 미래를 좌우한다는 말인데, 이는 지양해야 할 일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뉴욕 맨해튼의 길은 바둑판 모양이고, 보스턴의 길은 꼬불거린다. 어느 것이 효율적인지 물어볼 필요도 없겠지만 좋건 싫건 그대로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전통에 얽매인다면 그것이 곧 길따라 가기가 된다. 뉴욕의 길처럼 합리적 전통이면 다행이지만 보스턴처럼 불합리한 경우라면 낭비만 초래된다. 한번 만들어진 길은 고칠 수가 없지만 전통이 꼭 그래야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의지 문제이므로 필요하면 어렵지 않게 탈피할 수 있다. 혁신(innovation)은 현대경제의 열쇠말(key word)이다. 혁신은 새로운 시도에서 출발한다. 길따라 가기 현상은 과거에 억매이게 함으로써 혁신의 적이 된다.

        종합하면, 전통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나의 발전(development) 및 후대의 진전(advancement)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

 

3. 개선해야할 조상숭배

        한국인 고유의 조상숭배로 얘기를 풀었지만,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친 바로 그 공자님의 말씀처럼 지나침에도 문제가 많다 (過猶不及).

        직업상 필자는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젊은이를 많이 상대한다. 그들에게 “할머니가 몇 분이냐?”라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 당연히 “한 분”이라는 대답을 기대한 것이고, 그러면 외국인의 정답인 “두 분”과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로써 문화적 차이를 실감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대략 15년 전까지만 해도 기대대로 “한 분”이라는 대답이 절대다수였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점차 “두 분”이라는 답변이 증가하고 있다. 그런 변화는 아마도 시대추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실 누구에게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각각 두 분이며 이는 유전학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런데 부계만 중시하는 우리의 전통 때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마치 각각 한 분 뿐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다. 조부모는 엄연히 4분이고, 그분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증조부모는 모두 8분이고, 고조부모는 당연히 16분이 된다. 예컨대 각자의 34세 조상은 최대 20억 분이 될 수 있고, 유전학적으로 그 분들 각자와 나와의 관계에 어떤 차이도 없다. (정확한 계산으로는 34세 조상이 모두 1,717,986,000분이 된다. 중복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많지는 않다.)

        그런데 우리의 전통은 어떠한가? 4분의 조부모 중에서 딱 2분, 16분의 고조부모 중에서 딱 2분, 20억 분의 34세 조상 중에서 딱 2분만 골라서 섬기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모시는 세대별 딱 2분의 선정기준이 무엇인가? 어떤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렇게 해왔을 뿐이지 않는가? “길따라 가기” 말고는 설명할 말이 달리 없지 않는가?

        이쯤해서 필자의 생각을 밝히면, “조상숭배에 있어서 정도껏 하자는 것”이다. 어느 정도가 적절할지는 읽는 분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고, 재미삼아 2011년 하반기에 화제가 된 두 가지 얘기에 대한 연결고리를 아래에 제시한다.

 

        ①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華僑) 중의 다수는 94% 한국인이다.중국피 6.25% 한국피 93.75%. 이 아이는 중국인입니까 한국인입니까" (조선, 2011. 8. 4)

        ② 유태인 사회에서는 어머니가 유태인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는다. 역시 유태인다운 발상이다. Chinese Jews Face Existential Questions (WSJ, August 16, 2011)

 

4. 피할 수 없는 모계사회

        흥미로운 사실은 새로운 사회적 추세가 우리 전통에 천지개벽이 일어날 것임을 확연히 예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제와는 거리가 있어서 잘라서 말하면 한국사회가 모계중심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긴 세월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와 같은 철저한 부계위주의 조상숭배는 자연히 설땅을 잃게 된다.

        여러 사실들을 종합해서 판단하면 우리가 취해야할 바람직한 자세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결론이 나온다. 조상 혹은 족성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버리고 미래를 위해서 전향적으로 사는 것이 이른바 실사구시의 현명한 처세가 될 것이다.

        어떤 이는 필자가 외국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 “사람을 버렸다”고 평할지 모른다. 실제 그런지 필자가 말할 사안이 아니라서 각설하고, 스스로의 입장만 밝히고자 한다. 필자는 우연히도 종손으로 태어나서 제사, 시제 등을 빠짐없이 모시고 그에 대해 크게 불만이 없다. 그렇지만 그런 유산을 나의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지는 않다. 나를 닮았으면 그렇게 영민(英敏)하지도 못할 터인데 그들에게는 앞만 보고 살기도 벅찰 것이다. “나의 삶이 끝나면 그 육신을 불살라 재는 물에 뿌리고, 제사란 꿈에도 생각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