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지혜

자유와 안전의 균형 (#1)

안영도 2009. 1. 30. 13:08

 

 

 Patrick Henry declares ‘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in his 1775 speech urging the colonies to fight the British.

 

 

자유(Liberty)와 안전(Safety)의 균형 

 

“인간이 가장 먼저 누리고 싶은 것 중의 하나는 얽매이지 않고 안전하게 이전(移轉)하는 자유이다. …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자유와 안전 사이의 일정한 균형이 언제나 유지된다.” 이것은 미국 교통부장관이 2001년 9월 11일의 테러 발생에 대응하여 교통을 통제한 다음 시민들에게 양해를 구하고자 한 말이다.

         그날 이후 미국의 각계에서 자유와 안전에 대한 격론이 벌어졌지만 새로운 조치사항은 많지 않았다. 미 의회가 채택한 것 중의 하나는 공항의 안전감시 담당자를 민간인에서 연방 공무원으로 바꾼 것이었다. 특이하게도 백악관은 정부 규모가 확대된다면서 그런 입법에 반대 입장을 취했다. “국민 등록증 카드”를 도입하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부시 대통령은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미국의 여론은 “수천 명이 목숨을 잃은 사실도 중요하지만 수백만 시민의 자유도 소홀히 다룰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머잖아 울산시 관내의 과속운전 단속 카메라가 30대에서 88대로 증설될 모양이다. 그럴 때에 당국에서 흔히 내세우는 이유는 과속운전이 줄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음주 혹은 과속 운전은 제삼자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근절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단속만이 능사는 아니다. 모든 일에는 절제가 있어야 하며, 미 교통장관의 말처럼 자유와 안전 사이에는 균형이 취해져야 한다. 이제 과잉단속이 초래하는 문제점을 짚어보자.

         첫째, 무인 카메라는 운전자의 자유를 필요 이상으로 침해한다. 같은 도로라도 붐비는 시간과 한가할 때의 사정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낮에 시속 70㎞로 주행하면 위험해도 새벽에는 문제가 안될 수도 있다. 사람만이 그런 상황 판단을 한다. 막아야 하는 것은 사고이지 과속운전 그 자체가 아님에도 기계는 무차별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한다. 휑 뚫린 길을 60 이하로 달려야 하는 것은 보통의 운전자에게는 고통이다.

         둘째, 제한속도의 설정이 자의적이다. 기계가 그토록 엄정하게 재단하는 기준인 제한속도는 법규에 의해 기계적으로 결정된다. 과학적 검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현장의 특수상황이 참작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같은 길을 달리면서 속도 제한이 100에서 80으로, 60으로, 70으로 바뀌기도 한다. 불합리한 잣대에 따라 제재를 당하는 사람에게는 불만이 생긴다.

        셋째, 사생활을 침해한다. 감시 카메라를 발견하면 인간의 존엄성이 상처받는 듯하고 사진촬영이라도 당하면 기분이 나쁘다. 

         넷째, 단속의 사고방지 효과가 확실하지 않다. 주행속도와 사고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학자들도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과속보다는 곡예운전이 사고를 초래하는 더 큰 요인이라는 점이다. 아울러 카메라가 있는 지점에서 앞선 차량이 갑자기 속도를 줄여서 뒤따르던 운전자가 당황할 때가 많고 그것이 사고를 초래할 위험도 있다. 

         다섯째, 설사 사고방지에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투자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한대에 1억 원씩이나 하는 무인 카메라를 설치하기보다는 도로의 구조나 신호체계를 개선하고 가로를 정비하는 일이 효과적일 수도 있다.

         무릇 정부가 하는 일에는 엄정한 비용․편익 분석이 앞서야 한다. 과속으로 인한 인명사고는 막아야 하지만 과잉단속에 따른 희생도 감안해야 한다. 과속운전으로 무고한 사람이 피해를 입을 수 있지만 인간생활에는 어차피 어느 정도의 위험이 따른다. 지하주점의 화재로 말미암은 인명사고가 수시로 발생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교통사고의 방지만이 중요하다면 그 해법은 실로 간단하다. 자동차 혹은 차도를 아예 없애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 한 100m에 한 대씩 무인 카메라를 설치해도 사고는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거침없이 달려보는 것은 기본 자유에 속하고 인간은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전의 자유, 사생활 보호 및 존엄성 유지는 헌법에 보장된 것이다.

<출처> 안영도. "자유와 안전의 균형." 경상일보 2002. 4. 29

 

 

<후기>

         인생살이는 어차피 모험의 연속이다. 모험이란 "위험을 감수하면서 어떤 일을 시도하는 것"을 말하고 위험이란 "불확실성"(uncertainty)를 뜻한다. 잘 될 수도 있고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나쁜 결과를 방지하는 데에만 관심을 쏟는다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외출을 하면 언제 어디서 사고를 당할지 모르고, 음식을 먹으면 어떤 유해물질이 섞여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사고를 100% 방지하자면 집안에서 꼼짝하지 말아야 하고, 내가 가꾼 음식물만 섭취해야 한다. 온실가스 배출을 100% 예방하자면 당장 숨쉬기를 멈추어야 한다.

        교통사고를 100% 단속하는 길에는 세 가지 밖에 없다: 차를 없애든가, 길을 없애든가, 운전을 금지하든가...  음주운전을 근절하는 방법 역시 세 가지 뿐이다: 차량, 도로, 음주자 중의 어느 하나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술을 없앨 수 없음은 1920~30년대의 미국 금주법이 증명한 바 있다.) 익사사고를 방지하는 한 가지 길은  해수욕장, 담수욕장, 풀장, 수영장 등등을 없애는 것이다. (CJD 때문에 죽은 사람은 역사를 통틀어 단 하나도 없지만, 익사사고는 여름이면 하루에도 여러 건이 생긴다. 그런데도 아무도 풀장을 폐쇄하라고 시위하지 않으니 신기하지 아니한가?)

        결국, 인생에서 어느 정도의 모험은 필요한 것이고, 또 이런 저런 일을 해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 뜻인지, 어떤 PR 전문가 (Quentin Bell)는 아래와 같이 말한 바 있다.

 

[대중매체의 보도에만 따르면,] 우리는 에이즈가 무서워 성생활을 할 수 없고, CJD 때문에 쇠고기도 먹지 못한다. 뇌조직이 손상될까 봐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조차 없다. "We can't have sex for fear of AIDS, we can't eat beef for feat of CJD, and we can't use mobile phones for fear of getting our brains scrambled." (J. Elkington 1997, p. 191)

 

.....앓느니 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