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장마철
축구장과 바꾼 물난리
예측 가능한 연례행사
전국의 각지에는 해마다 어김없이 물난리가 난다. 2009년이라고 예외일 리는 없었다. 장마가 겨우 시작된 7월 중순에 전국 각지에 수재가 났고, 특히 부산에서는 곳곳이 물에 잠기고 꽤 여러 사람이 죽기도 했다.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대중매체는 한결같이 “천재(天災)가 아닌 인재(人災)”라고 나무라면서 수재의연금 걷기에 나선다. 둘 다 지극히 후진국에서나 있을 법한 현상이다. 자연현상은 상당한 정도로 예측할 수 있고, 시민의 안전함은 국가사회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얼마든지 막을 수 있는 초보적 사고가 한국에서 해마다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측 가능한 재해가 있다면 정부가 예산에 반영하여 대비할 것이지 왜 때마다 “이재민을 도와야 한다”면서 온 나라를 들쑤시는가?
기본을 갖추지 못한 나라
한국이 선진국 클럽인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에 가입한 것도 10년이 훌쩍 지났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본이 덜 된 나라”라며 수시로 한탄하고, 실제로 외국인으로부터 그런 말을 듣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고 선뜻 반박하기 어려운 평가일 터인데, 홍수나 폭설로 말미암아 인명 피해와 경제적 손실이 해마다 되풀이 되는 것이 바로 대표적인 한 단면(斷面)이다.
무릇 요순시대부터 치산치수(治山治水)는 국가경영의 가장 기본적인 사항이다. 그것이 시민 생활 및 국가경제 안정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언필칭 “세계 제11위 경제대국”이고 IT 강국이며, “월드컵 4강의 신화를 써서 국가위상이 업그레이드” 된 나라가 기본 중의 기본을 갖추지 못하고 있을까? (한국의 GDP 순위는 제21세기에 와서 계속 뒷걸음쳐서 2009년에는 제15위가 됐다.)
무자비한 “기회비용의 원리”
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기본을 제쳐둔 채 엉뚱한 일에 신경을 써 왔기 때문이다. 한국이라는 나라 전체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온 국민이 잘 해낼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어떤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거기에 투자된 재원과 노력이 부족했다는 말이다. 국가기본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기본 확충에 배정된 예산과 국민의 관심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본적인 일에 투자해야 할 예산과 관심을 어디에 써 왔는가? 한 마디로 답하기가 어려운 일이지만, 필자는 무엇보다 먼저 과도한 국제 체육행사 유치라고 생각한다. 올림픽, 월드컵, 아시아 경기대회, 유니버시아드 등의 각종 대회를 개최하거나 유치한 바 있다. 거기다가 ASEM, APEC, EXPO 같은 행사도 열었다. 그런 일을 선진국처럼 기존시설을 활용하고, 최소한의 격식을 갖추어 치른다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 번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행사마다 특별 지원법을 만들고, 유치부터 개최까지 길게는 6~7년 동안 온갖 정성을 기울여 준비한다. 막대한 자원이 투입되고 대통령부터 일선 공무원까지 “성공적 개최”를 되뇌면서 온갖 관심을 쏟는다.
그와 같은 “국제 체육행사에서의 성공”에 대한 대가, 즉 기회비용이 바로 “해마다 겪는 물난리”와 같은 것이다. 거꾸로 말하여 1981년의 “올림픽 유치 성공”을 전후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우리 국민이, 온 나라가 체육행사에 쏟은 돈과 정열의 1/10 만이라도 물난리 방지에 충당했다면 지금쯤 우리는 요순시대와 다름없는 치수(治水) 상태를 얻었을 것이다.
제한된 자원 때문에 체육행사의 성공적 개최와 치산치수의 둘을 동시에 얻을 수는 없다. 물난리를 감내해 가면서 “성공적으로 개최한” 체육행사를 통해서 얻은 것은 무엇인가? 체육행사의 제한적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자리에서 따졌기 때문에 더 이상의 논의는 피하지만, 그 혜택이 물난리의 피해를 덮을 만큼 클 수는 없다.
현명한 선택은 일상생활의 안온함
다시 말하지만 어떤 일이건 기회비용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이제 정부 혹은 지자체가 개최하거나 추진할 계획인 국제 체육행사의 기회비용이 무엇인지를 예를 들어서 살펴보자. 부산은 월드컵 경기장과 APEC 회의장 대신 해마다 물난리를 겪는다 (그림 참조). 몇 해 전에는 낙동강 하구 부근이 2주일간이나 물에 잠긴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다시금 하계 올림픽을 유치하겠다고 나선다. 인천시는 월드컵 경기장이 있음에도 수많은 아시아 대회 경기장을 새로 짓는다. 반면에 외곽순환도로와 영동고속도로의 시발점 사이는 연결이 부실하여 중동~장수 및 서창 분기점 구간은 언제나 먹통이다. 서울 시민은 쾌적해야 할 공원 부지를 쓰임새도 볼품도 없는 올림픽 경기장과 월드컵 구장에게 내주고 있다.
서귀포시가 2,000억여 원에 달하는 월드컵 구장 비용을 다른 데에 썼더라면 아마도 완전히 다른 도시가 됐을 것이다. 엑스포를 개최하는 데에 드는 돈을 생명산업 육성에 투입한다면 여수는 하나의 집적지(cluster)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강원도는 면적 17,000㎢, 인구 1.5백만으로 각각 경기도의 1.6배, 1/7이다. 도의 인구를 늘이는 것이 지상과제일 터인데 정열은 온통 동계올림픽 유치에 쏟고 있다.
대구는 세계육상 경기대회를 개최해서 무엇을 얻을 것이며, 광주는 유니버시아드에서 무엇이 남길까? 놀고 있는 10개의 축구전용 구장을 한 차례라도 더 쓰기 위해서 월드컵을 또다시 유치해서, 온 국민이 6년 동안 “성공적 개최”를 읊어야 할까? 그래서 어떤 혜택이 한국에 떨어질까?
10여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삶의 질,” 혹은 “일상의 안온함”(amenity)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그것은 빈곤을 벗어나면 누구나 찾는 것이며 한국인도 그럴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전근대적인 전시행정 때문에 그와 같은 기초적 소망을 희생해야 할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전시행정이란 정치인들의 주특기이지만 여론이 따라주지 않으면 추진할 수 없다. 정치인이란 여론에는 맥을 추지 못하니까. 결국 모든 것이 시민의 선택에 달려 있다. 자, 어떠한가? 전시성 행사인가, 아니면 일상의 안온함인가? 다시 말하지만 둘 다 얻을 수는 없다. 하나만 골라야 한다. 모두가 시민 개개인의 판단에 달렸다.
P.S. 연례행사인 물난리는 2010년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다음에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한 달 사이 두 번의 '물난리' 이것은 인재" 주민들 '분통' (조선일보 2010.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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